[시론] 가정친화적 직장문화 중요하다
일·가정 갈등 높은 사람, 우울증 위험도 높아
한국의학바이오기자협회
승인
2022.11.09 17:24 | 최종 수정 2022.11.09 17:34
의견
0
일과 가정은 우리 삶의 중요한 두 영역이다. 하지만 일과 가정은 서로의 영역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때론 침범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가정에서는 한 사람의 아내, 어머니, 딸이지만 동시에 직장에서는 팀장으로서의 리더 역할도 한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직장과 가정에서의 역할은 저글링(juggling)을 하듯이 어느 정도 굴러가지만 위태로운 순간들이 찾아온다.
직장 내 스트레스, 과중한 업무 부담, 늦은 회식이 가정에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늦은 시간에 퇴근하면 침대에 눕고만 싶은데 아이들은 놀아달라고 조르고 남편은 집안일을 신경쓰지 않는다며 핀잔을 준다. 반대의 경우도 생긴다. 가족 간의 갈등으로 인한 스트레스, 과도한 가사노동, 급작스러운 가족의 건강 문제는 일에 지장을 준다.
필자 역시 아침에 열이 나는 4세 아들을 두고 출근했는데 병원에서 진료를 보면서도 환자들의 이야기에 집중하기 어려웠던 경험이 있었다. 이렇듯 직장과 가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역할 간 갈등을 ‘일·가정 갈등’(work-family conflict)이라고 부른다. 일·가정 갈등은 직장인들의 중요한 스트레스 근원 중 하나이며 우울증을 비롯한 많은 정신건강 문제를 야기한다.
필자는 한국여성정책연구원에서 시행한 여성가족패널조사 2018년 데이터를 이용하여 4714명의 여성 근로자를 대상으로 일·가정 갈등의 정도와 우울증상 간의 상관관계를 조사했다. 이 연구에서 높은 수준의 일·가정 갈등을 느낀다고 응답한 여성들은 낮은 수준의 일·가정 갈등을 느낀 사람들에 비해 우울증상을 느낄 위험이 2.29배나 높아졌다. 특히 흥미로운 점은 일·가정 갈등으로 인한 우울증상에 취약한 그룹이 있다는 점이었다. 20~30대의 젊은 여성 직장인, 1명의 자녀가 있는 여성이 그러했다.
20~30대 젊은 여성들은 직장에서는 아직 하급자로서 과중한 업무 로딩(무게)을 경험하는 데 반하여, 아직 자녀들은 어리기 때문에 육아와 직무스트레스 양쪽이 만만치가 않다. 어린 자녀를 둔 20~30대 여성 직장인들의 경력단절이 많이 생기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또한 MZ세대들은 직장으로 인해 가정 생활에 지장을 받는 것에 대해 견디기 어려워하며 심리적 갈등을 느끼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생기기 시작하는 20~30대 여성의 경력단절은 큰 사회적 비용과 손실을 야기한다.
일·가정 갈등은 마치 도미노처럼 연쇄적인 심리반응을 통해 정신건강에 영향을 미친다. 제한된 시간과 에너지를 두고 벌어지는 양쪽의 줄다리기 같은 역할 갈등은 스트레스를 야기하고 정서적 소진을 초래한다. 이러한 심리적 반응은 번아웃 증후군(burn-out syndrome)으로 나타나는데, 정서적으로 지치고 에너지가 소진되는 느낌과 함께 일의 능률이 떨어지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번아웃 증후군이 지속되다 보면 우울증이 생긴다. 이 시점부터는 우울한 기분을 도저히 떨쳐내 버리기가 어려워지고 매사에 의욕이 사라져 일과 가정 모두 포기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심각한 경우 식욕 저하나 불면 같은 증상도 동반한다.
일·가정 갈등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사회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 유연근무제나 육아휴직과 같은 제도들은 육아의 부담을 지고 있는 젊은 직장인에게 절실한 제도일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러한 제도를 마음 놓고 쓸 수 있는 가정친화적인 직장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 진료실에서 일·가정 갈등으로 힘들어하는 여성 직장인들에게 육아휴직을 쓰면 어떻겠냐고 물어보면 이내 육아휴직을 쓸 엄두가 안 난다는 대답이 돌아온다. 회사 규정에는 있어도 부서 분위기상 용납이 안 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직장인들의 정신건강 문제에 대한 관심을 가져야 된다. 특히 위험군을 조기에 식별하고 그들에게 적절한 심리사회적 중재 서비스를 제공하면 치료가 필요한 우울증이나 불안장애까지 발전되지 않을 수 있다. 만약 치료가 필요할 정도의 심리적 문제를 겪고 있다면 정신건강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비용과 시간을 제공해야 한다. 고용주 입장에서는 이것을 비용이라고 생각하여 부담스러워할 수 있지만, 이제는 이런 비용 정도는 사회적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사회가 되었다고 본다.
한규만 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위 내용은 경향신문 6월 18일자에 한규만 교수가 기고한 글입니다.
저작권자 ⓒ 코리아 메디컬 바이오 리뷰,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